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라틴아메리카 근현대사 (문단 편집) === 엘살바도르 === [include(틀:상세 내용, 문서명=엘살바도르 내전)] > 엘살바도르에서는 미국 정부가 앉히고 지원하는 독재자들이 국민을 억압·고문·살인하는 상황이 수년동안이나 계속되고 있었지만, 여기 미국에서는 전혀 관심 밖의 일이었다. 그 사실은 미국에서 한 번도 보도된 적이 없었다. >----- > 미국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 p.62 엘살바도르 또한 20세기 초반부터 미국의 경제적 지배를 받았었다. 20세기에는 보수적 독재 정권과 반독재운동 그리고 쿠데타가 일어났었다. 즉, 내전과 독재, 친미 쿠데타 등으로 얼룩진 근현대사를 겪어왔으며, 이 과정에서 원주민 학살과 반공 군부에 대한 미국의 지원등의 역사를 겪었다. 사실상 미국 정부가 앉히고 지원하는 독재자들이 자국민을 억압·고문·살인하는 상황이 수년동안 계속되었다. 1970년대 들어 엘살바도르에는 '민중조직'이라는 이름의 농민단체, 조합, 노조, 뒤에서 자립 단체로 발전하게 되는 교회 소속의 성경연구 모임 등이 성장했다.[* 노엄 촘스키, 김보경, 미국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 한울, 1996 p.62~63] 1980년 2월 엘살바도르의 오스카 로메로(Oscar Romero) 대주교는 미국의 카터 대통령에게 자국을 통치하고 있는 군사혁명위원회에 군사 원조를 보내지 말아 달라고 간청하는 서신을 보냈지만, 몇 주 뒤 그 대주교는 대중 앞에서 설교중 암살당했다.[* 이 암살의 배후로는 네오파시즘 세력인 로베르토 도뷔송을 지목하고 있다.] 암살 사건 전에 엘살바도르에서는 미국의 지원을 받으며 자국 정부가 국민을 상대로 한 전쟁을 게시했다. 최초의 공격은 숨풀 강(Rio Sumpul)의 대규모 학살 사건이었는데, 온두라스와 엘살바도르 군대가 벌인 이 학살로 최소 600명이 죽었다. '''학살의 수법도 너무나 끔찍했는데, 갓난아기들은 마체타칼[* 나뭇가지 치기용으로 사용하는 칼이다.]에 마디마디가 잘렸고, 여자들은 폭행당한 뒤 강물에 던져져 익사했으며, 그 사건 이후 며칠 동안이나 강물 위에는 동강난 신체의 일부들이 떠다녔을 정도였다.''' 당연하게도 이 전쟁에서 가장 많은 희생을 치른 이들은 노동운동가, 학생, 신부나 그 밖의 국민의 뜻을 위해 일한 혐의를 받은 사람들과 농민들이었다.[* 노엄 촘스키, 김보경, 미국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 한울, 1996 p.64] 인도의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자 비자이 프라샤드에 따르면, 신부와 수녀들이 빈민가에 자리 잡았던 엘살바도르에서는 종교적인 파시스트 준 군사 조직이 간경한 구호, '''신부를 죽이고 애국자가 되자'''는 구호를 퍼뜨렸는데, 예수회 신부 루틸리오 그란데의 경우 수많은 살인이 자행되던 가운데 1977년 엘살바도르 보안군 손에 살해됐다. 이 같은 살육은 극우 암살단이 1980년 3월 오스카 로메로 산살바도르 대주교를 살해하면서 극에 달했으며, 1980년 12월 미국에서 온 수녀 4명이 엘살바도르 방위군에게 납치되어 성폭행당하고 살해되는 일까지 벌어졌다. '''이러한 엘살바도르 정부 측의 만행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1989년 미국으로부터 훈련받은 엘살바도르 육군 대대가 예수회 신부 6명과 가사도우미, 그리고 가사도우미 딸을 무자비하게 살해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비자이 프라샤드, 심태은, 워싱턴 불렛, 두번째 테제, 2022 p.126] 1993년 엘살바도르 진실위원회의 조사결과보고서에 따르면, 1980년 한 해 동안만 하더라도 국가폭력 및 암살 등에 의해 모두 2,579명의 희생자가 발생했다.[* 노용석, 「엘살바도르 내전과 냉전의 상처 엘모소떼(El Mozote) 학살의 진실과 의미」, 『민주주의와 인권』 11:2, 전남대학교 5.18연구소, 2011, 286쪽.] 무튼 엘살바도르는 극소수의 부유한 대토지 소유자들[* 14개의 대가문들로 이루어져 있다.]이 한 세기 넘게 좌지우지해온 나라였다. 이들은 온갖 수단을 다해 빈곤에 시달리는 대중의 반발을 억눌러왔으며, 특히 1970년대 들어 대중의 저항이 거세지면서부터 살인부대를 동원한 불법 살인과 학살이 급증했다. 1980년 가난하고 억눌린 이들을 대변하던 오스카 로메로 대주교가 암살당한 이후 다양한 좌파 게릴라 조직들이 파라분도 마르티 민족해방전선(FMLN)으로 통합됐다. 1980년 말 파라분도 마르티 민족해방전선이 승리를 목전에 두게 되자 브레진스키의 강권에 밀린 카터는 엘살바도르 독재정권에 대한 군사원조를 재개하기에 이르렀다.[* 올리버 스톤 피터 커즈닉, 이광일, 아무도 말하지 않는 미국 현대사 II, 들녘, 2015 p.140] 촘스키와 허만에 따르면, 엘살바도르에서는 1980년 3월 7일 발효된 계엄령으로 인해 자유롭게 연설을 하고 집회를 열 권리가 법적으로 중단되었다. 게다가 1980년 12월 3일 공포된 법령 507호는 증거나 혐의가 없어도 180일 동안 시민을 감금할 수 있는 권한을 군에 부여함으로써 사법체계의 뿌리를 송두리째 흔들었으며, 이런 상황에서 1982년 3월에 선거가 시행되기 이전의 30개월 동안, 그리고 1984년에 선거가 시행되기 직전에 수천 명의 시민이 붙잡혀 감금, 고문, 강간, 살해당했다. 모든 행위는 ‘반란’ 활동과 사상에 적용되는 법적 절차의 범위 밖에서 이루어졌다. 1982년 초에 접어들면서 계엄령은 경합을 벌이던 6개의 당을 대상으로, 선거를 앞둔 열흘 동안에는 엘살바도르 국민 전체를 대상으로 완전히 해제되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시민들은 선거가 끝날 때까지도 이 사실을 모르고 있었고 선거가 끝나면서 계엄령은 다시 발효됐다.[* 노엄 촘스키 에드워드 허만, 정경옥, 여론조작, 에코리브르, 2006 p.194] 1981년 레이건 행정부로 넘어오면서 엘살바도르 친미 정부에 의한 인명 피해는 13,000명을 초과했을 정도였다. 사실 미국 지도부는 베트남 전쟁 이후 엘살바도르를 반정부 게릴라를 소탕하는 새로운 전술의 시험 무대로 삼아 미군의 개입을 최대한 줄이면서 민중봉기를 진압하는 전략을 추진했다. 이에 따라 미국은 엘살바도르 친미 정부의 군대의 규모를 키우고 장비를 현대화했으며, 1983년에 이르러 병력의 정부군 병력의 규모가 5만 3,000명으로 증강됐다.[* 올리버 스톤 피터 커즈닉, 이광일, 아무도 말하지 않는 미국 현대사 II, 들녘, 2015 p.171][* 이들 중 다수는 미국 조지아주 포트베닝 기지나 미군이 운영하는 파나마의 아메리카 학교에서 훈련을 받았다.] 엘살바도르에서 일하던 카톨릭 신부 다니엘 산티아고(Daniel Santiago)는 예수교 잡지 <아메리카>에 엘살바도르 군사 훈련의 결과를 다음과 같이 생생하게 묘사했다. > 엘살바도르에서는 살인 특공대가 사람을 그저 죽여 버리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사람들의 머리를 베어내어 창에 꽂아 놓고 토지의 경계 표시로 사용하였다. 엘살바도르 재무 경찰도 남자들의 배를 갈라 내장을 꺼내 놓았을 뿐만 아니라, 생식기를 잘라내어 시체들의 입에 물려 놓기까지 했다. 방위군들은 여자들을 강간하고 난 다음 자궁을 베어내어 그것으로 그녀들의 얼굴에 덮어 놓았다. 그들은 어린이들까지도 단순히 죽이는 데 만족치 않고, 시체의 살이 뼈에서 다 떨어져 나갈 때까지 철조망 위로 질질 끌고 다니면서 부모들에게 그 광경을 지켜보도록 강요했다. >----- > 미국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 p.70 1981년 12월 또 다른 잔혹한 학살행위가 자행됐다. '''미군에게 훈련받고 미군 장비로 무장한 엘살바도르 정부군 아틀라카틀(Atlacatl) 대대가 엘 모소테 마을 주민 767명 전원을 학살한 것이다.''' 학살당한 희생자 중 358명은 13세 미만의 어린이었다. 희생자들은 칼로 찌르고 목을 자르고 기관총에 난사당해 죽었으며, 소녀와 성인 여성들은 강간당했다. <뉴욕 타임스> 특파원인 레이먼드 보너는 실상을 폭로하려고 애썼지만 <월 스트리트 저널>을 비롯한 친 레이건 성향의 신문들은 보너 기사의 신빙성을 맹렬히 물고 늘어졌으며, 미 행정부 관리들은 학살극을 은폐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올리버 스톤 피터 커즈닉, 이광일, 아무도 말하지 않는 미국 현대사 II, 들녘, 2015 p.173] 이 아틀라카틀이라는 조직은 1981년 3월에 미 육군 특수부대 학교가 반게릴라전 전문가 15명을 엘살바도르에 파견함으로써 창설되었는데, 창설된 시점에서 얼마 지나지 않아 대대적인 민간인 학살을 자행했다. 심지어 미국 교관들조차 이 군인들이 '''유별나게 잔인하며 우리 교관들은 포로들의 귀만 잘라오지 말고 산 채로 잡아오라고 설득하는 데 항상 애를 먹었다'''고 말할 정도였다. 이 아틀라카틀은 엘 모소테뿐만 아니라 1980년대 내내 수많은 마을들을 폭격하고, 민간인에게 총을 쏘거나 물 속에 빠뜨리는 등의 방법으로 또 다른 수백 명의 민간인을 죽였다. 그리고 이들에 의해 희생된 희생자의 대부분은 여성과 어린이 그리고 노인들이었다.[* 미국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 p.67][* 반면에, 친미정부에 맞서 싸우던 파라분도 마르티 민족해방전선(FMLN)이 저지른 테러는 말 그대로 미미했다. 심지어 유엔 조차도 FMLN 좌익게릴라가 내전 기간 동안 민간인 살해의 5%에 책임이 있는 반면, 모든 민간인 살해의 약 85%는 엘살바도르 군대와 암살단에 의해 저질러졌다고 추정했다. 말 그대로 제주 4.3 사건 당시 우익이 저지른 민간인 학살이 90%였던 것과 거의 유사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https://www.monde-diplomatique.fr/carnet/2009-03-19-Salvador|관련자료 1]][[https://www.usip.org/publications/1992/07/truth-commission-el-salvador|관련자료 2]]] 엘살바도르에서 1982년 3월에 선거가 시행되기 전의 2년 동안 일어난 가장 중요한 사건을 꼽는다면 군대와 독재정치에 어떤 식으로든 도전할 대중과 시민단체가 격감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1979년 후반 이후 군정이 추진한 주요 정책의 하나였다. 이 과정에서 주동자수천 명이 살해되었고 수많은 단체가 붕괴되거나 지하로 쫓겨났다. 교원노조는 수백 명의 회원이 살해되면서 그 수가 크게 감소했고, 군대의 점령으로 짓밟힌 대학은 문을 닫았으며, 학생과 전문직 단체는 체포와 살해로 붕괴되었다. 심지어는 AFLCIO(미국노동조합총연맹-산업별회의)의 지원을 받는 농민조합마저 주동자 100명 정도가 1979년과 1982년 3월 사이에 살해되었다.[* 노엄 촘스키 에드워드 허만, 정경옥, 여론조작, 에코리브르, 2006 p.201~202] '''1980년부터 1984년까지 엘살바도르의 암살단은 군대와 비밀경찰과 긴밀한 협 력 관계를 유지하면서 자유롭게 활동했다. 1982년 선거가 시작되기 이전의 30개월 동안 살해된 민간인은 매달 평균 700명 정도였다. 이 희생자들 중 다수가 강간,고문 신체 절단을 당했다.''' 더욱이 '''법의 심판을 받은 사건은 단 한 건도 없었고, 유일하게 4명의 미국인 여성을 죽인 사건만 미 의회의 압력에 못 이겨 모종의 법적 조치가 취해졌다.''' 심지어는 미국 자유노동발전연구소에 몸담고 오랫동안 미국의 엘살바도르 정책을 지지해온 윌리엄 도허티 (William Doherthy)조차 의회의 한 위원회에서 '''이 나라에는 제대로 돌아가는 사법체계가 없다고 발언했다.''' 이로부터 얼마 후에는 엘살바도르의 전 토지개혁 책임자인 레오넬 고메스가 같은 위원회에서 '''국가 테러는 대중을 두려움에 떠는 무저항 상태로 밀어넣었다'''고 증언했을 정도다.[* 노엄 촘스키 에드워드 허만, 정경옥, 여론조작, 에코리브르, 2006 p.210] 아무튼 이러한 미국의 대외원조를 통해 엘살바도르는 무려 50억 달러 가까이를 지원받았다. 그와 동시에 엘살바도르에서 일어난 친미정부의 백색테러와 학살로 최소 5만 명 이상의 무고한 이들이 목숨을 잃었으며, 50만 명에 가까운 엘살바도르 국민이 미국 이주를 시도하기도 했었다. 결국 이 내전은 1992년에 멕시코시티 차풀테펙(Chapultepec) 성에서 평화협정을 체결하면서 종결됐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